중고서적 엘피 씨디 사고 팝니다.
2016.05.10.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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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큰 변화가 있다면 그건 버스를 애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살아왔던 시골은 걸어서 모든 동네를 갈 수 있는 곳이었고 그 곳에서 버스를 이용한다는 것은 꽤 멀리,
그리고 내가 사는 시골보다도 더 깊숙한 시골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왠지 모르게 버스를 타면 나도 모르는 사이 스르르 잠이 들어버리고, 눈을 떠보면 한번도 와보지 못한 깊숙한 동네에 혼자 덩그러니 서있는 모습이 상상 되어 버스를 잘 타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지 나는 버스를 용감하게 타기 시작했고 이제는 꽤 가까운 거리는 버스를 애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아마 이사온 서울 집에서 친구들과 많이 만나게 되는 홍익대입구역이나 신촌을 버스로 십 분이면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 버스를 애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버스를 애용하고부터 창문 밖을 구경하는 것이 좋아졌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볼 수 없는 바깥 풍경들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내가 버스로 가는 곳들이 한정되어 있어 늘 보던 풍경을 보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가끔가끔 내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면 한껏 들뜨고 신이 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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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판도 늘 지나 다니던 길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글귀를 보자마자 얼른 핸드폰 메모장을 키고는 저 말을 적어놓았다.
나는 저 말을 보자마자 연인을 떠올렸다.
연인. 권태기가 온 연인. 그들의 시작은 저 가게였을 것이라 그렇게 상상했다.
여자는 우연하게 지나가다가 저 가게를 본다. 여자는 손에 씨디 플레이어를 들고 있다.
여자는 MP3 세대를 지나 핸드폰으로 노래를 듣는 시대가 왔음에도 씨디 플레이어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클래식한 느낌에 씨디 플레이어를 늘 손에서 놓지 않았고 플레이어를 켰을 때 들리는 씨디 돌아가는 소리를 좋아했다.
남자는 우연히 그 가게에 들른다.
남자는 오래된 것에는 흥미가 없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엘피판을 모으시곤 했고, 그는 아버지가 구하는 판이 가게에 있을까 들어왔다.
그 둘은 그 곳에서 만난다. 여자는 씨디를 고르다가, 남자는 엘피판을 구경하다가.
여자는 자신처럼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나 싶어 흥미가 생긴다.
남자는, 여자가 예뻐서 흥미가 생긴다.
둘은 눈이 마주치고 여자는 무엇을 찾는지 물어본다. 남자는 찾는 것의 이름을 말하며 아쉽게도 이 가게에는 없는 것 같다 말한다.
여자는 우연하게도 그 것을 찾아낸다.
남자와 여자는 각자 맘에 드는 물건을 하나씩 사서는 가게를 나온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묻는다.
밥은 먹었어요?
여자는 과제를 해야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지금 일생일대의 중요한 과제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한다.
아니요. 배 완전 고파요.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우연히 만나서 밥을 먹고, 서로 번호를 교환한다.
그들은 서로 가까운 학교에 다닌 다는 것에 반가워하고 같은 과를 다닌다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다.
남자는 아버지가 엘피판을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여자는 자신의 씨디플레이어를 보여준다.
남자는 그녀의 그런 점이 좋아진다.
여자는 버리지 않은 씨디 플레이어가 있다며 다행이라고 웃는 남자가 좋아진다.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헤어진다.
남자는 집에 데려다 줄까 고민하지만 부담스러워 할까 정류장까지만 데려다 주기로 마음을 먹는다.
여자는 헤어지기 아쉽지만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참기로 한다.
둘은 너무나도 아쉽게 헤어지고
남자는 버스를 타는 여자를 배웅하고는 문자를 한다.
내일은 뭐 먹을래요?
둘은 그렇게 여러 번의 밥을 먹고 연인이 된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서로가 권태로워 지기 시작한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 그러니까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그들은 서로 이해 못할 일이 많을 것이고 때문에 많이 싸울 것이다.
남자는 그녀가 오랜 시간 씨디 플레이어를 고집해 온 그 모습이 좋았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굽히지 않는 그녀의 고집에는 지쳤다.
여자는 버리지 않은 씨디 플레이어가 있다며 웃는 그의 모습이 좋았지만 이내 고장 나버린 그의 씨디 플레이어처럼 고장 나버린 것 같은 그의 마음에 힘들었다.
그들은 점점 서로에게 궁금한 것이 없어졌고, 만나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눈을 자주 마주치지 않았고,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연히 만나 불같이 사랑에 빠졌던 그 날의 모습을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다.
연애 초반 자주 들렀던 그 때 그 가게는 그들에게 잊혀진 공간이 되어버렸고
그 둘은 그렇게 헤어진다.
남녀가 우연하게 만나서 서로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마 거의 기적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기적의 확률로 만나 놓고는 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렇게 서로에게 흥미가 떨어지고 궁금한 게 없어지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기적처럼 만났기 때문에 서로를 만난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 생각하고 평생을 아껴주는 연인들이 있는 반면에 서로에게 지쳐 그날의 그 기분을 잊고 살아가는 연인들이 많다는 것이 참 슬프다.
하지만 결국엔 모든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들도 서로가 다시 또 그리워질 것이 분명하다.
머리 속에서 잊혀져 있던 그 가게를 다시 떠올리고는 눈물을 훔치며 한숨을 쉴 것이고, 처음 먹었던 밥집이, 그리고 그 날의 기억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이 결국 또 오는 것이다.
그 날의 기억때문에 힘들고, 내가 너를 보냈다는 것에 후회되고, 내가 지금 누구를 떠나 보낸 것인지. 내가 지금 얼마나 큰 실수를 한 건지 한 없이 우울하게 되는 날이 온다.
삭제했지만 잊지 못한 전화번호를 누르며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 몇 번이고 핸드폰을 집어 던지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맞다.
연인들은 쉽게 자신들이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잊는다.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는 그들이 왜 헤어졌는지를 잊곤 한다.
헤어지고 나서는 왜 좋았던 것만 기억나고, 눈물겹게 힘들던 헤어지는 순간은 까맣게 잊어버리는지.
하지만 결국은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더 오래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다.
아니면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거나.
내가 익숙했던 지하철을 떠나 버스가 편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힘들게 가슴앓이를 했던 사람들도 헤어진 연인을 떠나 다들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 익숙해 질 것이다.
사람은 진짜 망각의 동물이다. 그렇게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아 다시는 연애를 하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우연히 지나가다 본 누군가의 미소에 다시금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연애의 과정들이다.
주변에 새롭게 시작하는 연인들이 많아진다.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면서 그들이 처음 사랑에 빠졌을 그 때를 잊지 않는 사랑을 하길 바란다.
서로의 소중함을 잊지 말고, 한발 먼저 다가가서 잡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번에는 또 어떤 간판이 내 눈을 사로잡을지 모르겠다.
다음 번 내 눈을 사로잡은 간판은 좀 더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상상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사실 신촌의 번화가 사이에 숨어있는 블루모텔이라는 간판을 발견했는데, 아주 우울한 이야기가 상상이 되었다.
결국 내가 달달해야 달달한 이야기가 떠오를 것 같다.